다사다난 나의 직장

지루한 출장, 배려를 배워오다.

Dr.Classy 2025. 1. 26. 22:44
반응형

출장, 그리고 한 잔의 따뜻함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순간들이 찾아온다. 출장은 그중에서도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낯선 경험이다. 낯선 도시, 익숙하지 않은 호텔, 끝없이 이어지는 미팅……. 그 모든 것이 익숙해질 것 같다가도 매번 새로운 피로로 다가온다.  


기차 안에서의 시간  

어느 가을, 나는 출장길에 올랐다. 아침부터 이어지는 미팅을 마치고 저녁 기차를 탔다. 창가에 기대어 흐릿한 풍경을 바라보며, 몸은 의자에 녹아내리는 듯했다. 옆자리에서는 누군가의 통화 소리가 들려왔다. 업무 내용인지, 가족과의 잡담인지 구분되지 않았지만, 그 익살맞은 말투가 공간을 채우는 유일한 생기였다.  

기차는 달렸다. 들쭉날쭉한 속도에 몸이 흔들리며, 창밖의 풍경은 점차 어두워졌다. 노트북을 열어 보고서를 작성하려 했지만,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잠시만…….’ 다섯 분을 눈을 붙이려던 순간, 옆자리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눈을 뜨니, 모르는 사람이 조심스럽게 내 어깨를 톡톡 치고 있었다.  

“잠드시는 줄 모르고…… 이거 받으세요.”  
손에는 따뜻한 캔커피가 들려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하자, 그는 창가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자리 바꿀게요. 여기서 자면 목 아플 거예요.”  

작은 배려의 무게  

그는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였다. 출장 중임이 티가 나는 차림새에,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자리를 바꿔 앉은 후, 그는 서류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마치 ‘이제 방해하지 않을 테니 편히 쉬세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커피 캔의 열기가 손바닥을 데웠다. 한 모금 마시니 속이 따뜻해지며 잠이 달아났다. 창밖을 바라보던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출장 자주 다니세요? 저는 이번 달만 세 번째네요.”  

짧은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피로는, 마치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춘 듯 했다. 서로의 직장 이야기, 출장 시 항상 챙기는 물건, 자주 가는 역 근처 음식점……. 이야기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그가 내릴 역이 다가오자, 그는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다음엔 제가 잘 때 깨워주세요.”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그 뒤로 그를 다시 만난 적은 없다.  

돌아오는 길에 든 생각  

귀사 길 버스 안에서 나는 문득 그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그의 배려가 익숙하지 않은 도시에서 작은 위로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출장은 늘 외로웠다. 낯선 공간에서 홀로 일을 끝내야 하는 부담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쓸쓸함…….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남의 일에 귀 기울여주는 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깨달았다.  

회사 생활을 하며 ‘효율’만을 좇던 나는, 어느새 주변을 돌아보는 법을 잊고 있었다. 동료의 미소, 점심시간의 잡담, 커피 한 잔의 여유——그 모든 것이 업무의 속도를 늦추는 방해물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 작은 인간적인 순간들이 오히려 지치지 않고 달려갈 수 있는 연료가 된다는 걸, 출장길에서 만난 낯선 이가 알려준 것이다.  

변화된 출장 습관  

그날 이후, 출장지에서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호텔에 체크인할 때면 프론트 직원에게 미소를 건네고, 기차에서 옆자리 승객과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끄덕여본다. 간단한 인사 한 마디가 대화의 시작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묵묵한 동행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난주에는 출장지에서 만난 신입 사원이 차가운 밤공기에 움츠러드는 걸 보았다. 문득 그 중년 남자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뜨거운 핫초코를 건네며 내뱉은 말은 의외로 서툴렀다.  
“추우시죠? 제가 마시려고 샀는데…… 하나 더 사게 되네요.”  

그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건데.’ 하지만 그가 웃으며 고개를 숙일 때, 오랜만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익명의 온기  

우리는 종종 삶의 교훈을 거창한 사건에서 찾으려 한다. 하지만 진짜 깨달음은 아무 일상 같은 순간에 스며든다. 출장지에서 만난 낯선 이의 커피 한 잔, 동료의 묵묵한 도움, 지나가던 이의 미소——그것들이 쌓여 내게는 ‘회사’라는 공간을 견디게 하는 버팀목이 되었다.  

요즘은 출장 가방에 여분의 캔커피를 넣어 다닌다. 누군가의 잠든 어깨를 살짝 치며 건넬 그 날을 위해. 어쩌면 그 커피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지만, 그 자체로도 나에게는 따뜻한 마음의 짐이 된다.  

출장은 여전히 피곤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속에서 작은 온기를 찾는 법을 알 것 같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