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이 필요하세요?" 그 말 한 줄의 무게
회사 복도는 늘 분주하다. 서류 더미를 안고 오가는 발걸음, 키보드 소리, 때로는 누군가의 한숨이 공기를 가른다. 그런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귀에 맴도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도움이 필요하세요?" 말을 건네는 이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 사원, 지훈이었다.
피할 수 없는 질문
지훈은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만큼 항상 주변을 맴돌았다. 내가 프린터 앞에서 종이가 걸렸을 때, 커피머신 버튼을 두 번 눌러도 아무 반응이 없을 때, 심지어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가 허리춤에 묻은 커피 얼룩을 발견했을 때도——그는 어김없이 나타나 물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해주세요!"
처음엔 귀여웠다. 신입다운 열의가 느껴져 거절할 때마다 "괜찮아, 내가 할게"라고 웃어 넘겼다. 하지만 그의 질문은 주기적으로 반복되었고, 어느덧 그조차도 업무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보고서를 쓰다가도 문득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오늘은 안 나타날까?'
익숙함의 함정
어느 날 오후, 나는 팀 프로젝트 마감에 쫓기고 있었다. 새로 도입된 시스템에 데이터를 입력해야 하는데, 예상치 못한 오류가 연달아 발생했다. 화면을 붙들어매고 있던 중,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제가 도울 부분이……."
"괜찮아! 니가 건드리면 더 엉켜."
나도 모르게 짜증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지훈은 말없이 자리로 돌아갔고, 그날 이후 그의 질문은 뜸해졌다.
며칠 뒤, 동료가 사무실에서 혼자 야근하는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지훈이 요즘 왜 저래? 전엔 분위기 메이커였는데."
내심 찔렸지만, 바쁜 일정에 묻어두기로 했다. '신입이라서 그렇지. 금방 쿨해지겠지.'
무너진 장벽
마감일 아침. 시스템 오류는 여전했고, 머리는 멍해졌다. 새벽 5시, 책상 위에 엎드려 잠깐 눈을 붙인 사이, 누군가가 내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지훈이 모니터를 가리키며 스크린샷을 넘기고 있었다.
"저…… 어제 퇴근하면서 우연히 봤어요. 이 부분에서 오류 나시는 거죠?"
그는 내가 지난주에 겪었던 문제점을 하나씩 짚어냈다. 밤새 자료를 찾아본 듯, 눈 아래로 다크서클이 선명했다. "제가 초기에 비슷한 실수를 해서……. 해결책이 있을 거예요."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키던 그의 모습에서 어딘가 모르게 당당함이 느껴졌다. 내가 놓친 디테일을 캐치한 것이었다. 오류를 수정하는 데 함께한 두 시간 동안, 우리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키보드 소리와 간간이 들려오는 한숨만이 교차했다.
배운 것과 가르친 것
해결이 되었을 때, 지훈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됐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소리 냈나요?"
그의 얼굴에서 초심자의 순수한 기쁨이 묻어났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의 '도움' 요청은 단순히 호기심이 아니라, 스스로를 성장시키기 위한 발버둥이었음을.
"고마워. 너 덕분에 살았어."
내가 건넨 말에 그는 홍당무가 됐다. "아니에요! 전 그냥…… 제가 도움받고 싶어서요. 선배님들 일하는 거 보면서 배우려고."
그 순간, 문득 내가 신입이었을 때가 떠올랐다. 상사에게 매일 물어보던 질문들, 실수를 덮어주던 동료의 눈짓, 혼자서는 절대 찾지 못했을 해결책들……. 어느새 나는 '가르치는 자'가 되었지만, 정작 배우는 것은 내 쪽이었구나.
질문의 힘
지훈은 여전히 "도움이 필요하세요?"라고 묻는다. 하지만 이제 나는 먼저 되물린다. "너는 어때? 무슨 일 있으면 말해." 서로의 대화가 일방통행에서 길이 된 것이다.
어제는 그가 미팅 자료 정리를 도와달라고 했다. 함께 머리를 맞대며 페이지를 넘기던 중, 문득 그가 중얼거렸다.
"선배님은 왜 이 부분을 강조하셨던 거예요?"
질문에 답하려고 과거의 데이터를 찾아보는 사이, 나도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었다. 가르치려는 순간, 배움은 자연스레 따라오는 법이다.
익명이 아닌 동료
우리는 종종 '업무 효율'을 위해 관계를 단순화한다. 선후배, 상사와 부하, 협력사와 거래처——. 하지만 지훈은 그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의 끈질긴 질문이, 나로 하여금 '혼자서만 해내야 한다'는 독한 신념을 내려놓게 했다.
요즘은 사무실에서 질문하는 목소리가 점점 많아진 것 같다. "이 기능 어떻게 쓰는 거죠?", "시간 되시면 좀 봐주실래요?"——. 그 소음이 오히려 팀의 호흡을 맞추는 리듬으로 들린다.
'도움'이 주는 선물은 해결책만이 아니다. 함께 어깨를 부딪히며 걸어가는 길 그 자체가, 일터에서 잊고 있던 온기를 되찾아주는 법이니까.